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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자연성과 둥지의 시학(박남희 시인)-지난계절의 좋은 시 읽기.
 신지혜    | 2006·09·28 00:00 | HIT : 4,792 | VOTE : 695

<계간시평-지난계절의 좋은 시 읽기(2005년 봄호)


"신지혜 시인의 공기 한 줌"

                               <계간시평-지난계절의 좋은 시 읽기/박남희>



시의 자연성과 둥지의 시학



박남희(시인)


1. 둥지와 시의 친연성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육체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상대적으로 인간의 삶에서 자연의 중요성은 축소되고 문명적 가치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은 삶의 편리함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대신, 그동안 인간과 자연을 연결시켜주던 유기체적 관계망이 서서히 파괴되어 가고, 급기야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파괴하고 적대시하는 관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요즘 들어서 새삼스럽게 생태문제와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단지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직접적으로 파괴하고 변형시키는 심각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의 역사에서 파괴가 새로운 발전을 지향하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인간과 자연은 궁극적으로 한 몸이라는 점에서 서로를 파괴하는 적대적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원로 철학자이면서 시인인 박이문 교수는 현대철학의 위기를 진단하는 자리에서 이데올로기로서의 철학의 한계를 진단하고, 언어적 둥지 짓기로서의 철학을 새롭게 제창한 바 있다. (『현대문학』2004년 11월호) 그는 철학적 인식 대상을 우주 전체로 보고 이러한 대상을 개별적으로 인식할 것이 아니라 전일적으로 인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하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가장 근본적인 우주 전체에 대한 총체적· 전일적 인식 양식 즉 세계관의 발견과 동시에 ‘개념의 궁극적 명료화’를 지향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철학적 개념의 궁극적 명료화를 위해서 철학적 건축 모델로서 ‘둥지’라는 자연의 이미지를 빌어 오는데, 이것은 인간의 건축물보다는 자연의 건축물이 보다 우월한 생물학적, 생태학적, 미학적 기능과 상징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박이문 교수의 이러한 사유는 단지 철학적 사유의 범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에 걸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현대 시학과의 소통 가능성이 열려있다. 따라서 이 글은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현대시의 제 양상을 ‘둥지의 시학’이라는 명제를 통해 해명해 보려는데 목적이 있다.


‘둥지’는 일반적으로 새의 보금자리를 일컫는데, 새의 둥지는 새들이 알을 낳아 기르고, 외부의 적이나 비바람, 추위 등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때로는 그곳에서 안식을 취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삶의 터전이다. 이렇듯 새의 둥지는 생물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은유적으로 해석해보면 둥지의 주인인 새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둥지는 새의 보금자리이면서 새 자체이고 새와 끊임없이 소통함으로써 그 존재이유를 지니게 되는 상징성을 띤 대상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특히 ‘둥지’는 건축공학적으로 보아도 자연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존재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대상이다. ‘둥지’는 나무 위에 있거나 바닷가 바위틈에 있거나 풀숲에 있거나 그 어떠한 환경에 처해있더라도 나름대로의 충분한 적응력과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다. 박이문 교수는 둥지의 특성을 폭넓은 상징성으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둥지는 “자연과 대립되는 일종의 기술적 산물이면서도 자연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면서 더 큰 자연을 형성”하는 것이고, “둥지라는 건축물은 자연이 아닌 자연이며, 문화가 아닌 문화”임을 말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정의는 둥지가 자연과 문명, 자연성과 인위성의 경계선상에 존재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궁극적인 차별과 조화의 상징임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새가 자신의 둥지를 지을 때 자연적 소재, 즉 나뭇가지나, 돌, 진흙 등뿐 만 아니라 자신의 부드러운 가슴 털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연에 대한 특별한 관계성을 띠게 된다.


이상의 논의에서 새와 둥지의 관계를 시학적으로 원용해보면 시인과 시의 관계로 쉽게 환치가 가능하다. 둥지가 새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듯이 시 역시 시인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시와 시인은 유기적으로 한 몸이면서 서로가 구별되는 특수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둥지의 시학’을 새와 둥지, 즉 시인과 시의 관계에 국한 시키지 않고, 에이브람즈가 문학작품을 우주, 문학작품, 작가, 독자 등 네 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 것처럼 새와 둥지와 자연과 문명이라는 4가지 관계망을 중심으로 조망해 볼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문명’은 ‘독자’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대비적 상황으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2. 둥지와 자연 친화적인 시

시사적 차원에서 볼 때 근래의 시사적 흐름은 모더니즘이 주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모더니즘 시학에의 편중은 시작방법적인 측면에서 폭 넓은 확장을 이룬 반면, 인간정서의 순화에 역기능을 초래하거나 인간의 감성을 이성으로 억눌러서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깨뜨리는 문제점을 노출하였을 뿐 아니라, 급기야는 서정시에 대한 폄하나 편견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새의 둥지가 새와 자연, 또는 문명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듯이, 시 역시 인위적인 포즈보다는 오히려 자연적인 조화를 이룰 때 보다 뛰어난 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작위적인 느낌이 들거나 지적 논리에 예속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진정한 ‘둥지’로서의 시를 이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앙브롸즈 파레에 의하면 둥지(새집)는 새에게 가장 알맞은 형태의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민음사, 1990) 시 역시 완전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둥지의 가치관과 일맥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즉, 우리가 좋은 시를 말할 때 시적 완결성을 논하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하다. 그 집은
불태웠는데 고스란히 남았다.
포크레인으로 밀었는데
천장과 벽이 스르르 주저 앉았는데
멀쩡히 서 있다.
이상하다. 그 집은
팔아버렸는데
다른 사람의 이름이
뚝딱 문패에 걸리고
그가 그 집을 어딘가로 가져갔는데
가져가 처분했는데
도로 그 자리에 와 있다.
이상하다. 그 집은
어둠이 집어삼켰는데
검은 창들이 깨지는 밤
파편들만 밟혔는데
다시 세워졌다.
이상하다. 그 집은
잃어버렸는데
놓쳐버렸는데
나는 여전히 가지고 있다.
이상하다. 그 집은
밖으로 나왔는데
나는 아직 그 속에 살고 있다.

―이수명,「이상한 집」전문(『다층』2004년 가을호)

여기서 이수명의 시를 인용한 것은 이 시의 시적인 완결성이라는 차원보다는, 이 시가 훼손 될 수 없는 영원한 시적 가치에 대한 상징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의 문맥이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불태우거나 팔거나 부숴졌는데도 영원히 시적화자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추억속의 집’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집이 상징하는 것이 단순히 물리적 차원의 집을 넘어서서 ‘영원히 훼손되지 않는 가치’에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독법을 요한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에서 이 시를 해석한다면, 이 시가 가리키는 집은 물리적이고 인위적인 힘에 의해서 파괴되지 않는 ‘영원한 집’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영원한 집’의 범주에는 영속적 가치와 완결성을 지향하는 시도 포함시킬 수 있다. 새의 둥지가 인간의 노력으로는 완성할 수 없는 이상한 영역을 지니고 있듯이 시 역시 인간의 이성적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구석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한 집’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시인이라는 존재 역시 ‘이상한 집’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새의 둥지는 너무나 다양하다. 물가 자갈밭에 있는 물떼새 둥지나 진흙으로 만든 제비둥지, 남의 둥지에 보금자리를 잡은 뻐꾸기 둥지, 높은 나뭇가지에 있는 까치둥지 등 그 형태와 모양이 각양각색이다. 세상에는 이처럼 다양한 둥지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새의 둥지는 높은 나뭇가지에 있는 둥지이다. 높은 나뭇가지에 자리잡고 있는 새의 둥지는 지상과 하늘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가 지니고 있는 상징성과도 일맥 상통한다. 나무 위의 둥지는 바람과 추위에 약하지만, 통풍성과 조망성은 뛰어나다. 하지만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고 둥지가 따라서 흔들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점에서 단점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몸짓이라는 점에서 아름다운 것이다. 시 역시 나무 위의 둥지처럼 현실과 이상, 세상에 대한 전망과 소통성, 환경과 자연 친화성 등 복합적인 요소를 골고루 지니고 있는 시가 뛰어난 시라고 말 할 수 있다.

새 집들에 둘러싸이면서
하루가 다르게 내 사는 집이 낡아간다
이태 전 태풍에는 기와 몇 장 이(齒) 빠지더니
작년 겨울에 허리 꺾인 안테나
아직도 굴뚝에 매달린 채다
자주자주 이사해야 한 재산 불어난다고
낯익히던 이웃들 하나 둘
아파트며 빌라로 죄다 떠나갔지만
이십년도 넘게 나는
언덕길 막바지 이 집을 버텨왔다
지상의 집이란
貧富에 사무쳐 살이 우는 동안만 집인 것을
집을 치장하거나 수리하는
그 쏠쏠한 재미조차 접어버리고서도
먼 여행 중에는 집의 안부가 궁금해져
수도 없이 전화를 넣거나 일정을 앞당기곤 했다
언젠가는 또 비워주고 떠날
허름한 집 한 채
아이들 끌고 이 문간 저 문간 기웃대면서
안채의 불빛 실루엣에도 축축해지던
시퍼런 家長의
뻐꾸기 둥지 뒤지던 세월도 있었다

―김명인,「집」전문(『현대시학』2004년 11월호)

인간에게 있어서 집은 먹고 입는 것과 더불어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일 뿐 아니라,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자식을 기르고 사랑을 하는 안온한 보금자리이다. 그러한 관점을 좀 확대해서 보면 집은 넓은 의미의 고향이고 조국이고 우주이고, 그리운 어머니의 자궁이다. 집없음(homeless)의 문제가 단순히 가난의 문제를 넘어서서 심리적 고향상실이나 방황, 또는 떠돎의 문제와 연관되는 것도 집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폭넓은 상징성 때문이다.
김명인의 「집」은 이러한 의미에서 가난의 문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이면에는 인간의 지상적 삶에 대한 성찰(나그네 의식)과 가장으로서 느끼는 심리적 상실감을 복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집은 “새 집들에 둘러싸이면서/ 하루가 다르게” 낡아가는 집이라는 점에서 문명으로부터 소외된 집이고, “자주자주 이사해야만 한 재산 불어난다”는 현 시대적 경제 논리에서 벗어나 있는 집이고, “貧富에 사무쳐 살이 우는 동안만 집인” 뼈아픈 지상적 삶을 몸소 체현함으로서만 존재 이유가 있는 집이고, “먼 여행 중에 집안의 안부가 궁금해져/ 수도 없이 전화를 넣”는 그리움의 집이고, 탁란을 위해 남의 둥지에 세 들어 사는 ‘뻐구기 둥지’와 같은 집이다. 또 한 언덕 막바지에 있는 집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높은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새의 둥지와 같은 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명인의 「집」역시 세상의 보통 집과는 거리가 먼 ‘이상한 집’이다. 이 시에서의 ‘집’이 앞에서 거론한 이수명의 시에서처럼 ‘시’ 나 ‘ 시인’으로 읽히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다른 것에 비해서 시와 시인이 소외되는 현상이나, 그런 줄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낡은 집(詩)을 고집하는 태도 등은 충분히 이러한 개연성을 암시해 준다. 이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필자가 앞에서 지적한 “현실과 이상, 세상에 대한 전망과 소통성, 환경과 자연 친화성”등을 가지고 있는 것 뿐 아니라 ‘집’과 ‘시(시인)’가 지니고 있는 친연적 동질성의 무의식적 울림 때문일 것이다.
“살다온 집의 벨을 누른다/ 오랫동안 나를 이끌던 안의 소리를 듣는다/ 때로는 웃옷의 단추를 채우며/슬리퍼를 채 꿰지도 못하고/ 눈이 휘둥그래져 혀를 빼물기도 했으리라”로 시작되는 박홍점의 「나를 데려오지 못하고」(『제3의 문학』2004년 가을호) 는 떠나온 집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수명의 앞의 시와 상통하고, ‘집밖의 나’와 ‘집 안의 나’가 소통하기를 원하지만 서로 단절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김명인의 앞의 시 속에서 ‘새 집과 낡은 집’의 대비를 연상시켜주는 시이다.


3.둥지와 유기체적 상상력

새의 둥지를 가만히 살펴보면 수많은 나뭇가지나 풀, 깃털들이 유기적인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 둥지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린다 해도 쉽게 망가지거나 형태가 변형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나 우주는 새의 둥지처럼 객체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커다란 둥지이다. 다음의 시는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는 시이다.

새벽 산책길,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 때마다 공기 한 줌이 빨려들었다 빨려나간다
삼천대천 우주가 내 코끝으로 들락날락한다

나를 빠져나간 공기가 다시 네 속으로 빨려든다
너를 빠져나온 공기가 다시 내 속으로 빨려든다

내가 빨아들인 이 공기도
지금은 아득히 사라진 古代, 그 어느 死者의
내부를 탱탱이 살찌웠던 그 물빛
숨결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풀무를 돌리며
차가운 눈물을 따뜻이 데웠을 것이다

저 길가에, 푸른 화두 주렁주렁 매달고 서있는
상수리나무들과, 희미한 종소리로
새벽을 틔워내던 초롱꽃들. 위태로운
허공 절벽을 시시때때로 박차 오르던 이름 모를 새들과
나 한 숨결 고루 나누면서도
가없는 수평의 겸허를 깨닫지 못했다
새벽 산책길,
불현듯 내 코 끝이 찡해진다

―신지혜,「공기 한 줌」전문 (『시안』2004년 가을호)

인용 시의 시적 화자는 새벽 산책길에 크게 심호흡을 하면서 새삼스럽게 ‘공기 한 줌’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는다. 평소에는 하찮게 느껴지던 공기 한 줌이 고대에 살았던 “어느 死者의/ 내부를 탱탱이 살찌웠던 그 물빛 숨결”이었다는 사실과, 자신이 산책하는 길가의 상수리나무나 초롱꽃, 허공절벽을 박차 오르는 이름 모를 새들의 숨결이었음을 새삼 느끼면서 시인은 인간의 우월의식을 버리고 모처럼 세상의 미물들과의 ‘가없는 수평의 겸허’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나’라는 주체와 세상의 무수한 ‘타자’가 결국 같은 호흡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유기체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시에서 나는 공기를 수용하던 공기의 집이며 나 이외의 사물들 역시 공기의 집으로서 서로 유기적으로 소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세상과 우주는 무수한 집과 집이 공기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우주 공동체인 셈이다.

달이 세상에 내려와
通情하는 자리에
꽃이 핀다
바람의 이불을 깔고 앉아
달의 허리를 휘감은 밤
세상은 일제히 황홀에 달아오른다

하늘로 돌아간 달
배는 점점 둥글게 불러와
환한 만월로 뜬다
보름달의 꽃들이
더 처연히 붉은 것은
달의 그리움 때문일 터,

밤마다 달은 땅에 내려와
밤이슬을 밟고 다닌다
흐린 날 달은
안개 속으로 흘러다닐 뿐
별의 시앗을 연애하지 않는다

어느 캄캄한 골짜기라도
지상의 꽃대를 품어 정을 통하고

달이 흘린 癡情의 애액이 떨어진 곳에
사람이 핀다

―권영준,「달의 癡情」전문(『현대시학』2004년 11월호)

권영준의「달의 癡情」은 천상적이고 우주적인 존재인 달과 지상적인 존재인 꽃이 밤에 만나 통정하는 광경을 유기체적인 상상력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과학적으로 보면 달은 무기물이고 꽃은 유기물이기 때문에 서로 정을 통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천상적 존재와 지상적 존재는 그 공간적 상거(相距) 뿐만 아니라 인간이 기본적으로 느끼는 정서적 거리로 보더라도 서로 통정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시인의 상상력은 이러한 거리를 일시에 무화시켜 버린다. 시인은 우주를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로 보기도 하고, 우주 안의 서로 다른 존재들을 서로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동일한 존재로 바라보기도 한다. 달이 지상에 내려와 꽃과 통정한 후 달은 하늘에서 배가 불러 보름달이 되고, 보름날 꽃들이 더 붉은 것이 달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는 시인의 상상력도 이러한 발상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시인은 급기야 “달이 흘린 치정의 애액이 떨어진 곳에/ 사람이 핀다”고 하여 인간 생명의 탄생을 자연의 통정과 연결시키고 있다.
“새들은 알을 깔 때만 둥지를 튼다 집을 짓는다 몸을 만들 때만 집 지어 들어앉고 있었다 口卒啄(줄탁) 하고 있었다 알이 새가 될 때까지만, 날을 수 있을 때까지만 들어앉고 있었다 마침내 알집마저 버렸다 그 다음엔 각자 집 없는 천사였다 푸른 하늘을 드나드셨다”(한글표기-필자)가 전문인 정진규의 「집」(『세계의 문학』2004년 가을호)은 새와 둥지와 하늘의 관계를 인간의 삶과 연결시켜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에 의하면 새들은 알을 까서 새끼를 기르고 하늘로 날려 보낼 때까지만 둥지를 튼다. 그 후에 새는 둥지를 버리고 ‘집 없는 천사’가 된다.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존재가 된다. 둥지는 결국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이고, 푸른 하늘로 표상되는 저 세상에서는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다는 점에서 이 시는 정진규 시인의 무위와 자유정신의 궁극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4. 인공적 둥지와 사라지는 꿈

지금까지 둥지가 지니고 있는 속성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시가 보여주는 자연성을 살펴보았는데, 세상에는 자연의 둥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도로 발달된 현대 문명은 자연의 둥지 이면에 웅크리고 있는 인공적 둥지의 실체를 보여주기도 한다.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전도서

이곳에서 나는 축구선수
나는 공을 가로채는 수비수 상대방 다리 사이로 절묘한 스루패스를 하는 최고의 미드필더 160km의 강슛을 날리는 스트라이커
이곳에서 나는 재능있는 축구선수

이곳에서 나는 특수부대원
적의 심장을 정확히 맞추는 스나이퍼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용감한 돌격대원 위험한 작전을 지휘하는 지휘관
이곳에서 나는 유능한 특수부대원

이곳에서 나는 神
나는 글자를 만들어내는 창조자 분신을 만들어내는 복제자
질서를 수호하는 수호가
이곳에서 나는 절대적인 神

이곳에서 나는 A
시민공원을 산책하고 있는 걷는 사람 A 만원버스에 타고 있는 가방든 사람 A 트레드밀 위를 달리고 있는 땀흘리는 사람 A
이곳에서 나는 투명한 A

―한상규,「투명한 A 」전문(『시와 반시』2004년 가을호)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라는 장 보드리야르의 명제를 전제로 내세우고, 제목 밑에 ‘시뮬라크르의 自轉’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시는,‘세상 도처에 존재하는 시뮬라크르화된 존재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현대라는 둥지의 모조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실재가 사라지고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해버린 사회, 실재보다는 미디어를 비롯한 온갖 이미지나 기호들이 판을 치며 실재를 소멸시키는 사회가 현대 사회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뮬라크르화된 가상현실 속에서‘나’는 “적의 심장을 정확히 맞추는 스나이퍼”즉 저격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돌격대원이나 지휘관, 특수부대원이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나는 공원을 걷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만원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 또는 트레드밀 위를 달리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급기야는 분신을 만들어내는 복제자로서의 신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나는 아무것이나 다 될 수 있는‘투명한 A'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시인이 전제로 내세운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나오는 구절을 천천히 음미해 보자.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는 결코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숨긴다”는 역설적 명제를 옹호함으로써 현대적 진실의 허위성을 역설적 언어로 폭로한다. 이러한 역설적 명제를 전제로 해서 출발한 이 시 역시 역설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둥지의 시학에 비추어서 비유적으로 말하면, 시적 화자는 세상의 도처에 존재하는 모조둥지에서 끊임없이 복제 되어 나오는 새들을 진짜 새라고 당당한 어법으로 강변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뮬라크르적 환경 속의 ‘나’인‘투명한 A’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고 그 어떤 존재로도 고정화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비실재적인 ‘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대는 결국 실재의‘나’를 모조의‘나,로 대체해버리는, 정체성의 혼란마저 느끼게 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더 이상 허위와 진실을 구별할 수 없고, 따라서 우리가 믿던 꿈도 더 이상 진실일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즉 꿈이 사라진 시대인 것이다.

달에는 토끼가 없고 계수나무가 없고
그러니 그 그림자도 있은 적 없고
차갑게 하얀 흙 다만 가라앉아 있을 뿐,
수십 억 년 동안 바람 한 점 없고

저 검은 하늘의 별들은, 죽은 이의 영혼이 아니고
神도, 그와 놀던 사람도 짐승도 아니고
멀리서 누가 켜둔 등불이나 등대도 아니고,
그 조차 이제 잘 보이지 않고
(중략)

이제 나는 꿈꾸지 않는다
내가 꿈을 꾸지 않아도 달빛은 하얗게 빛나고
높은 산 위에서는 크고 작은 별 반짝이고
꽃들은 향기로이 피고 져서 가을에는 열매를 매달지

나는 이제 꿈꾸지 않는다
지는 해와 뜨는 해를 가슴 두근거리며 바라보지 않고
봄과 가을을 그리운 사람처럼 기다리지도 않는다

꿈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없음을,
꿈으로 이룬 것은 이 세상 몫이 아님을,
오히려 꿈 때문에 많은 것을 잃어버렸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꿈이나 삶 따위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희중,「이제 나는 꿈꾸지 않는다 」부분(『시와 반시』2004년 가을호)

시인은 이미 꿈꾸던 시대의 진실들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우리들이 몇 만 년 동안 꾸어온 꿈이 헛된 꿈이었으며, 그러한 꿈 때문에 자신은 야위고 꼬인 실상의 몰골만 지니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꽃의 빛깔과 맛과 냄새 역시 꽃이 스스로 복제와 번식을 위한 일일 뿐이라고 자연적 대상에게 마저 불신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시인은 결국 꿈꾸기에 대한 불신의 끄트머리에서 ‘꿈꾸지 않기’라는 방식으로 자연과 만나기를 시도한다. 시인이 택한 이러한 방법은 물론 반어적이다. 시인은 꿈꾸기를 통해서 자신이 그동안 얻은 박탈감을 ‘꿈꾸지 않기’라는 방식으로 복수하고 있는 것이다. 둥지의 시학의 차원에서 보면 시인은 꿈이라는 둥지가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음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늘을 꿈꾸지 않은 새가 하늘을 날 수 없듯이 꿈꾸지 않는 시인은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다. 꿈은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별로 효용가치가 없지만 시인에게는 생각의 새를 하늘로 날려 보내는 둥지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우리를 한없이 슬프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반어나 역설이라는 방식으로 눈물을 흘림으로써 지금 우리에게 처해있는 슬픔을 조금도 감소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제3의 문학> 2005년 봄호

2006년 08월 25일 09시 14분에 가입
신지혜시인,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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